교과서가 됐건 소설이 됐건, 연극 대본이 됐건 "원작"을 능가하는 번역작은 있을 수 없다.
단어단어가 내포할 수 있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며 그러한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 문단을 이루고 문단이 모여 하나의 완성된 글이 됨을 감안했을 때 원작을 읽어도 저자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데 번역이라는 또 하나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글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에 가능한 번역본을 읽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었지만... 이렇게 편협한 문학세계가 오래가지는 못하기에 번역본들을 읽기 시작한 지 몇 해가 됐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수집하는 것도 좋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소유한 책들을 아직도 꽤 많이 갖고 있다. 언젠가는 작은 도서관을 갖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들어 깨달은 것은...
분명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동일한 책을 수회 새로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책을 구매하는 돈을 아낄수 있겠지만.. 메멘토도 아니고 시간을 들여 읽은 책들의 내용은 커녕 나름대로 느낌점과 생각했던 점들을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것이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전 주원이랑 얘기를 해 보니.. 나만 그런것이 아니었나보다.
왜 사람들이 책을 읽고 시간을 내서 독후감을 쓰나 궁금해 했었다. 솔직히 학생 때 주어지던 독후감 숙제들이 매우 싫었고 어쩌면 그래서 영화나 연극을 보면 개인적인 후기를 항상 썼음에도 불구하고 독후감을 별로 쓰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젠 더이상 숙제도 아니고 책에 대한 나의 메멘토 증상을 줄여보기 위해 독후감을 조금씩 써 볼까한다.
아멜리 노통브 (Amelie Nothomb)
한국에서는 아멜리 노통 또는 아멜리에 노통브로도 알려졌으나 지난 2004년 국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름의 발음은 "아멜리 노통브"라고 강조한바 있다고 한다.
아메리 노통브은 벨기에 출신 작가이다. 1992년 살인자의 건강법을 처녀작으로 시작하여 거의 매년 새로운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아버지가 외교관이어서 어렸을 적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노통브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글에서 이러한 노통의 이국적 경험을 강조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시아에서의 경험이 소설에서 많이 반영되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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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출간된 베스트 셀러. 노통브의 10번째 작품이다.
공항 대기실이라는 좁은 공간안에서 벌어지는 두 남자의 이야기.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에게 또 다른 남자가 접근하여 대화를 유도한다. 그러나 그는 독자가 짜증날 정도로 집요하게 말로써 주인공을 괴롭힌다.
대체 왜 주인공을 괴롭히는지 알기 위해선 계속 읽어 나아가야 하기에 책을 집어던질 수가 없다. 아마 이것이 노통브의 작가로서의 능력이 아닌가 싶다. 단순 문자를 통해 읽는 사람에게 절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감정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왜 자신에게 이러한 감정이 생겼는지 궁금해서라도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그러한 능력.
대화가 상당히 많은 소설이어서 핑퐁게임을 지켜본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집요한 남자의 과거 회상을 통해 공항 대기실 밖의 공간으로 이야기가 연결된다.
내가 좋아하는 감정몰입이 가능한 소설 스타일이다.
추천.

2003년 출간. 노통브의 9번째 작품.
대학생인 블랑슈 (Blanche)가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
이름은 "White"로 순수함을 나타내는 듯 하나, 사실 순수하다기 보단 low self-esteem을 갖고 있는 외로운 아이 블랑슈. 겉도는 자들은 중심에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갈망하게 마련. 블랑슈는 동기 크리스타를 동경한다.
놀랍게도 크리스타는 블랑슈에게 접근하고 둘은 친구로 발전해 나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크리스타는 블랑슈의 친구라기보다는 앙숙에 가까울 정도로 블랑슈를 괴롭힌다: 블랑슈의 방을 빼앗고, 평화를 빼앗고, 가족마저 빼앗아 버린다. 대체 왜 그런지 궁금할 따름이다. 블랑슈는 자신의 것들을 다시 빼앗아 오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결국 승리한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타라는 캐릭터가 너무 싫어서 책에 몰입하기가 힘들었다.
비추천.

1992년 출간. 문단 데뷔작.
25세의 나이에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장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작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어떤 노작가가 암을 진단받고 죽음을 선고받게 되고 그의 마지막 길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의 인터뷰로 소설은 전개된다.
역시나도 노통브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겹고 혐오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책의 전반은 노작가의 작은 집 안을 배경으로 하지만 소설이 전개되면서 노작가의 청소년기가 펼쳐지게 되고 예상치 못했던 그의 과거가 밝혀진다. 단, 위의 두 소설과는 달리 과거 작가들과 작품들을 대화 내용에 여럿 삽입하고 있어 문학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독자들에게 한층 더 재미있을 듯하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역자가 달아준 설명마저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추천.
Posted by Jekkie


